산재처리 후 손해배상 청구, 왜 아직 끝난게 아닐까?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근로자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산재처리입니다. 산업재해로 인정되면 치료비, 휴업급여, 장해급여 등 일정 부분은 국가가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산재보험금을 받으면 “이제 법적으로 더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산재보험은 사회보장제도일 뿐, 사업주의 불법행위 책임까지 모두 대신해 주는 제도가 아닙니다. 즉, 산재처리 후에도 사업주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 남은 손해가 있다면, 별도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최근 대법원은 이 쟁점에 대한 판단 기준(2023다297141)을 제시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해당 대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왜 산재보험금을 받았더라도 추가 손해배상이 가능한지, 그리고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계산되는지를 설명드립니다.
사건 개요: 건설현장 그라인더 사고와 산재보험금 지급
① 사고 경위와 산재 인정
A사 건설현장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는 그라인더 작업 중 날이 튀는 사고로 손목에 중대한 상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고는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인정되어 산업재해로 처리되었고, 근로복지공단은 해당 근로자에게 약 5천만 원이 넘는 장해급여를 지급했습니다.
산재보험금 중 장해급여란 산업재해로 인해 노동능력이 영구적 또는 장기적으로 저하된 경우 지급되는 보상으로, 앞으로 벌 수 있었던 수입 감소를 일정 부분 보전해 주는 성격을 가집니다.
② 추가 손해배상 소송의 제기
근로자는 산재보험금만으로는 자신의 손해가 충분히 보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사고 이후 정상적인 근로가 어려워지면서 발생한 일실수입, 즉 “사고가 없었다면 벌 수 있었던 수입의 상실”이 문제였습니다.
이에 근로자는 사업주가 안전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산재보험과는 별도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산재처리 후 손해배상 청구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핵심 쟁점: 손해배상 계산 방식(공제 후 과실상계 vs 과실상계 후 공제)
① 두 가지 계산 방식 차이
이 사건의 핵심은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순서로 계산할 것인가였습니다. 법적으로는 다음 두 가지 방식이 문제 됩니다.
- 공제 후 과실상계: 손해액에서 산재보험금과 같은 성질의 금액을 먼저 공제한 뒤, 그 남은 금액에 근로자의 과실비율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 과실상계 후 공제: 전체 손해액에 근로자의 과실비율을 먼저 적용한 뒤, 그 결과에서 산재보험금을 공제하는 방식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계산 결과는 차이가 큽니다. 특히 산재보험금이 큰 경우, 과실상계 후 공제를 적용하면 사업주의 배상 책임이 사실상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② 하급심과 대법원의 판단 차이
하급심은 “사업주가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보험금이 지급되었으므로 과실상계 후 공제가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근로자의 추가 손해배상 청구는 전부 기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은 공제 후 과실상계가 원칙이라고 선언하며, 하급심 판결을 파기환송했습니다.
대법원 판결 핵심 논리: 보험은 면책이 아니라 분담
1) 산재보험의 법적 성격에 대한 판단
대법원은 먼저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본질을 짚었습니다. 산재보험은 근로자의 생존과 생활 안정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이지, 사업주의 불법행위 책임을 면제해 주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즉, 공단이 지급한 보험급여 중 근로자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부분은 공단이 최종적으로 부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업주의 손해배상 책임이 보험금 전액만큼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공제 후 과실상계가 타당한 이유
- 먼저 손해 중 산재보험과 성질이 겹치는 부분에서 보험금을 공제해야 합니다.
- 그 후 남은 손해에 대해서만 근로자의 과실비율을 적용해야 형평에 맞습니다.
- 그렇지 않으면, 사업주는 자신의 불법행위 책임을 보험제도를 통해 과도하게 면제받게 됩니다.
이 논리에 따라 대법원은 “제3자가 개입하지 않은 사업주 단독 불법행위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공제 후 과실상계를 적용해야 한다”고 명확히 판시했습니다.
적용 법령 및 해석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다른 보상이나 배상과의 관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80조 제2항은 “보험급여를 받으면 사업주는 그 금액의 한도 안에서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금액의 한도 안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보험급여와 동일한 손해에 대해서만 면제가 된다는 뜻이지, 모든 민사상 손해까지 면제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민법상 과실상계 규정과의 연결
민법 제396조는 과실상계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손해 발생에 피해자에게도 과실이 있다면, 그 비율만큼 손해배상액을 줄일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대법원은 이 규정을 산재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하되, 적용 순서는 반드시 보험금 공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산재처리 이후 손해배상 준비 전 확인사항3가지
① 보험급여와 손해 항목의 정확한 구분
보험으로 보전된 손해와 그렇지 않은 손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이중배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송에서 가장 먼저 다퉈지는 부분입니다.
② 사업주 과실의 입증 여부
산재처리와 손해배상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민사상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사업주의 안전관리 소홀, 보호의무 위반 등 불법행위 요소를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③ 과실비율 산정의 현실적 영향
근로자에게 일정 부분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공제 후 과실상계를 적용하면 배상액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점이 이번 판례의 실질적 의미입니다.
산재처리 후 손해배상 관련 자주 묻는 질문(FAQ)
Q1. 산재보험금을 받았으면 사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산재보험금은 일부 손해에 대한 보전일 뿐이며, 사업주의
불법행위로 인한 추가 손해가 있다면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합니다.
Q2. 왜 계산 방식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계산 순서에 따라 사업주의 책임이 남느냐 사라지느냐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근로자 보호와 형평성을 위해 공제 후 과실상계를 선택했습니다.
Q3. 사업주 과실이 100%라면 어떻게 되나요?
이 경우 근로자의 과실상계는 적용되지 않으며, 산재보험으로 보전되지 않은 모든
손해에 대해 사업주가 배상 책임을 집니다.
마무리: 산재처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
산재보험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모든 손해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번 대법원 판례는 산재처리 후 손해배상 청구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했고, 그 계산 기준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사고 이후의 삶에 실질적인 손실이 남아 있다면, “이미 산재처리를 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법은 여전히 근로자의 손에 남아 있는 손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